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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위기인가 - 서재경

최은원 2012. 3. 17. 19:17

한국교회 위기인가 - 서재경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이 파산할 수도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스톤 대학의 로런스 코틀리코프 교수와 같은 전문가들은 불어나는 재정적자와 연금, 복지 시한폭탄으로 파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버드의 로저 포터 교수도 미국의 복지제도를 항로를 이탈한 비행기에 비유하면서 궤도를 빨리 수정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정부가 현 세대의 미래에 대한 지불 능력을 상실해, 이미 파산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비판합니다. 부자라도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면 파산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세계에서 최고의 교세를 자랑하는 한국의 개신교가 무너질 수 있을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900만명에 가까운 신도를 자랑하는 한국 개신교의 이미 노출된 문제점들을 파고 들어가 보면 안심할 수만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숨어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노정된 문제만으로도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기 때문이지요.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기에 앞서 이미 교회의 몰락을 체험하고 있는 다른 나라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사라지고 교회당만 남아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위용을 자랑하던 교회들의 지금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기독교 이후의 시대로 명명되는 지금 유럽 교회는 정부의 보조금과 관광객의 입장료로 건물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합니다. 독일에서는 정부가 지원금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직자를 줄이도록 구조조정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사라지고 교회당만 남은 것이 유럽의 현실입니다.

 

유럽보다는 덜하지만 위기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Revolution)’의 저자이자 여론조사전문가인 조지 바나는 교회가 여러 가지 활동을 왕성하게 펼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다른 주요 단체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구성원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감리교는 지난 2004년 한 해 동안 43%의 교회가 결신자를 한 사람도 얻지 못했습니다. 199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미국의 기독교신자는 5%의 증가에 그쳤습니다. 같은 기간 힌두교가 237%, 불교가 170%, 이슬람교가 109% 증가한 것에 비하면 충격적인 통계입니다. 인구 75%가 기독교도인 미국에서 교회의 성장 속도는 인구출생률에 못 미칩니다. 미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죽어가는 미국교회는 목사도 구하기 어려워

 

출석교인들의 평균 연령은 60세에 이르러 활기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사이버교회, 가정교회, 이동교회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미국교회 사정에 밝은 옥한음 목사에 따르면 40만에 가까운 교회 중 목회자를 구하지 못하는 교회가 많은데 그것은 목사가 박봉에 시달리며 고생 하는 탓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신학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이런 고든과 같은 성직자들은 미국교회가 그 동안 종교소비자(religious consumer)만을 양성했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에 쏠려있을 뿐, 그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헌신해야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인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인가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사정은 캐나다에서도 비슷합니다. 국제화, 도시화, 세속화, 페미니즘의 도전을 받고 있는 캐나다 교회에서 장로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합니다. 루터교의 신자는 지난 70년대에 인구대비 3.3%였으나 30년이 지난 오늘날엔 그 비율이 2%로 줄어들었습니다. 교인들의 고령화문제와 목회자 양성에 겪는 어려움은 미국과 마찬가지입니다. 캐나다에서는 교회동창회가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그만둔 교인들이 그룹을 만들어 성직자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남미를 여행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들러본다면 놀라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통계상으로는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도인 이 나라에서 활발한 종교 활동이나 진지한 신앙인을 찾아보기란 불가능합니다. 출생, 세례, 결혼, 사망 때만 교회를 이용하는 지경이지요. 과거에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으나 지금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마치 박제된 맹수를 보는듯합니다.

 

교회에 닥친 세 가지 도전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던 서양교회의 영락은 한국교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교리, 리더십, 효용에서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회의 '초월적 유신론'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둘째 교회 지도자들이 더 이상 정신적 리더가 아닙니다. 셋째 교회가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유효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은 마치 루터의 종교개혁 전야를 연상케 합니다. 루터 당시에도 긴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교리상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교황청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교회의 행태를 문제 삼았으나 교회가 여기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유럽에서 초월적 유신론에의 도전은 이미 지난 20세기 초반 불트만, 본회퍼와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존 로빈슨 목사는 이미 1960년대에 신에게 솔직히라는 저서를 통해 선배 신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의 심각성을 전파함으로써 교계 안팎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런 도전에 대한 교회의 유효한 응전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자 서구의 지성인들은 더 이상 유신론적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가슴이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이치니까요.

 

지난날 성직자들은 지식과 교양에서도 교인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대학교육이 보편화되지 못하던 시절, 신학은 고등학문이었습니다. 교육은 성직자들을 세속적 지식에서도 신도들을 리드하기에 충분하도록 양성했습니다. 또한 성직은 왕이나 귀족들과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 엘리트였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지금에 이르러 신학 교육만으로는 교인들을 리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인텔리 교인들을 리드하려면 신도들보다 더 우수해야만 하고 따라서 더 많은 학습이 필요합니다. 성직보다 더 좋은 직업이 수두룩한 다원화 사회에서 이것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

 

교회는 아우슈비츠 대학살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아우슈비츠 대학살 이후 신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 절망합니다. 독일의 저명한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에서 매우 작은 분이셨고, 이 시대에 아무런 친구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태양, 정의는 빛나지 않았고, 성령은 이 땅에 거할 장소를 전혀 갖지 못했다고 절규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전쟁, 폭력, 기아, 질병, 동성애, 불평등, 낙태, 이혼, 마약, 가정해체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유효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축자영감,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부활, 재림 및 천당과 지옥에 대한 확신 등 '근본주의 5대 강령으로 교인들을 묶어 놓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던 것입니다.

 

미국장로교회는 1990년의 202차 총회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을 인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교인들을 괴롭혀온 신앙상의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한 고심의 결과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신앙고백은 종전의 사도신경과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머리의 천지창조부분은 사라졌고 동정녀 탄생은 삭제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도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어, 그의 죄 없는 삶을 입증하시고, 죄와 악의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영생에 이르게 하셨다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교회의 위기는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위기를 감지하고 대책 마련을 서두르는 교회도 있습니다. 최근 열린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 컨퍼런스도 그런 움직임 중의 하나로 보여 집니다. 그는 이번 집회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넘어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또 교회와 교인은 사회봉사에 앞장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야기가 토픽이 된다는 것 자체가 한국교회의 허약함을 드러냅니다. 이 집회를 계기로 6천여 명이 단체로 장기기증을 서약 했습니다. 장기기증이 드문 한국사회에서 이만한 일은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집회에 빌리 그래엄 목사의 부흥회 때와 같은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움직임이 언론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있다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경영전문가들이 분석한다면 이동원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은 지난해 한국교회 미래리포트를 펴냈습니다. 이 자료에는 유의할만한 통계가 많이 있습니다. 책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세가 다소 주춤한 것은 사실이나, 90년대보다 덜 비관적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며,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한국교회의 장래는 밝다고 말합니다. 과거 서양의 교회들도 그런 낙관론이 우세했고 미국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낙관론이 대세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물이나 현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교회지도자들이 교회의 현상을 진단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경영전문가들로 하여금 냉정하게 한국교회를 진단하도록 하는 것이 해결의 첫걸음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국교회의 정확한 문제점과 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들이 교회개혁안을 만들게 하고, 이 초안을 교회지도자회의에서 심도 깊은 토론을 거쳐 인준하고, 최종안을 국민투표에 준하는 전교인투표를 통해 확정하는 세 단계의 접근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부흥에 필요한 대안은 크게 보아 세상에 답을 주는 지성기독교로의 전환 평신도 참여가 보장된 지도체제의 개편 교단과 개교회의 강점을 융합한 조직개혁 이웃사랑을 생활화하는 프로그램 확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래학자 캐롤린 코빈은 위대한 리더는 미래를 먼저 본다라는 저서에서 21세기에는 성품의 훌륭함만으로는 리더가 될 수 없고, 영리 조직이든 비영리 조직이든 상관없이, 모든 리더들은 경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지난 60년대 말 일찍이 퍼스널컴퓨터의 대중화를 예언하여 적중시킴으로써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물론 교회 문제에 경영전문가들을 동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거나 혹은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를 교회지도자들에게 맡기는 것보다 낫다는 점에서 차선책은 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효과를 상실한 종전의 처방만을 반복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인구센서스 결과는 양식 있는 크리스천들을 공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입만 벌리면 1200만 신도라고 떠들던 설교자들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따르면 1995년에서 2005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에 가톨릭 신도는 74.4% 증가하여 514만으로 늘어난데 반해 개신교는 1.6% 감소한 861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신도가 줄어든 종교는 유교(-50.4%)와 개신교뿐입니다. 불교는 같은 기간 3.9%, 원불교는 49.6%가 증가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10년 이내에 가톨릭이 개신교를 앞지르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결단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몰락한 서양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냐, 아니면 경장(更張)을 통해 거듭날 것이냐의 비장한 선택입니다.

 

가톨릭의 발전전략 vs 개신교의 성장전략

 

김진홍 목사는 한국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가톨릭은 일사불란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가지고 있어 국민이 신뢰하고 있다. 또 기독교가 물량주의를 앞세운 부패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 비해 가톨릭은 사제들의 삶 자체가 청빈하다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1970년대에 가톨릭은 세 가지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첫째, 신도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고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 훈련에 집중 투자하며, 둘째는 교회 지도자인 사제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힘쓰며, 셋째는 가톨릭의 대사회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복지활동과 사회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가 외적 성장에 주력하는 동안 내적 발전을 선택한 가톨릭이 돋보입니다. 그동안 개신교와 가톨릭은 정반대의 길을 간 셈인데 이제부터 개신교가 가야할 길은 과연 어디일까요?

 

수년전 강남의 한 교회로부터 창립25주년을 맞아 비전설정과 함께 발전전략수립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의 장기비전으로 나누는 교회의 컨셉을 제안했습니다.

 

거기에는 동네 노인들을 위한 노인대학, 동네 아이들을 위한 영어교실, 동네 주부들을 위한 문화교실운영 등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업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부는 이런 사업을 지우고 그 대신 성지순례, 25주년 특별헌금, 교인 배가운동, 해외개척교회설립을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은 그 교회만의 행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평균적인 모습입니다.

 

교회의 위기, 과연 해결할 수 있는가 미국정부의 파산은 한 사람의 똑똑한 대통령만 나오면 해결되는 재앙입니다. 대통령이 의회를 설득하고, 국민을 다독거려 지금의 제도를 바꾸면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는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교회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재의 제도아래서, 누구도 누구를 존경하지 않는 성직자 사회에서, 기복과 물신에 휘둘리는 비이성적인 신앙풍토아래서, 유효한 지도력을 상실한 교단체제에서,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나선다고 해도 리더십 발휘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가치 있는 일입니다. 또 위기에는 어려운 위험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기회도 숨어있습니다. 교회가 위기를 잘 극복하면 뜻하지 않은 큰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양교회의 맥없는 추락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은 한국교회가 기독교 세계의 마지막 등불이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국내외의 많은 독자들이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의견을 보내주신 분들은 한 결 같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아 평범한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의견이 이 글을 완성하는데 용기와 함께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속이 시원했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진솔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점치게 됩니다. 교리문제는 세계교회가 당면한 공통의 도전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신봉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이 땅에 알려지기 전 살다 간 부지기수의 조상들이 문제가 됩니다. 교리대로라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얻지 못했으므로 모두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렇게 믿자니 신자들은 마음이 불편합니다.

 

유교적 충효가 한국인에게 소중한 가치로 평가되는 현실에서, 조상의 영혼은 지옥에 두고 후손만 천당에 간다면 마음 편할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구원의 해석을 놓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교회는 마땅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의화(義化, justification)논쟁과도 이어집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톨릭의 교리입니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의화논쟁은 구교와 신교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불법적 면죄부 판매가 선행으로 간주되던 당시에는 루터의 주장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면 선행을 기피하고 무임승차로 천국에 가려는 풍조가 퍼지게 됩니다. 개신교가 몸집은 불리면서도 선행에 소극적인 것은 교리상의 취약점에 기인합니다.

 

성경에 써있네 교리상의 의문에 대해 교회가 내놓는 손쉬운 답은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신앙이지 신학이 아니다는 도그마가 판을 칩니다. 의심은 신앙심이 약한 탓이라고 뒤집어씌우기 때문에 교리상의 모순도 의심하는 쪽의 잘못이 됩니다. 교회는 영리하게도 그런 함정을 일찌감치 파놓고 누구든 걸려들면 믿음이 약하다고 손가락질해왔습니다.

그 바람에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는 죄의식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설명이 궁하면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교회가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서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정해 놓고 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바람에 순진한 교인들 중에는 성경이 태초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교회에도 우민화 정책은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지요. 우민화는 인류역사에서 지배자들이 끊임없이 느껴온 유혹입니다. 백성이 무지할 때 지도자는 쉽습니다.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백성이 깨치면 그만큼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말도 많고 권리 주장도 늘어납니다.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도들이 많은 것을 이해하려들 때 교회지도자들은 부담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성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그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한때는 성직자들만 성경을 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자크 아탈리는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 자손을 번식하며 살아온 시간 중 역사로 기록된 것은 불과 0.1% 정도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걸으면서 지금까지의 보내온 시간은 약 600만 년 정도인데 반해 우리에게 기록된 시간은 1만 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유구한 인류역사에 비춰볼 때 1만년에도 못 미치는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도 교회는 정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을 가르친다고 해서 신앙심이 낮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에서 보듯이 교회가 잘못된 이론을 고수하다가는 나중에 더 큰 권위를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실적 요소가 대종을 이루지만 부분적으로는 설화적 요소, 신화적 요소, 환상적 요소, 예언적 요소, 문학적 요소 등이 고루 섞여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심각한 성직자의 자질문제

 

서양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의 자질문제도 위기를 가속시킵니다. 한국의 성직자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정신적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의 초창기 성직자들은 당시의 대중들과 비교할 때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하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려운 세상의 지식에도 무불통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엘리트요, 선생이요, 예언자요 동시에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의 훌륭한 성품은 암울한 백성들에게 넉넉한 그늘이자 기둥이기도 했습니다. 성직은 한국사회에서도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정에 책이 거의 없던 시절, 어느 성직자의 서재에도 책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산업화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엘리트들이 신학을 지망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역사가 깊은 신학교는 명문대학의 반열에서 탈락했습니다. 한편 부실한 신학교가 난립하기 시작했고 이런 기관을 통해 목회자들이 양산되었습니다. 부실한 교육이 부실한 성직자를 양산하면 그 결과는 교회의 부실로 이어집니다.

 

현재 미국 유학파들이 목회에서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그나마 그들이 선진교육을 받음으로써 토종 목회자들보다 콘텐츠에서 우위에 있고, 그들의 선진국 체험이 교인들을 리드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무리가, 양이 이끄는 사자무리보다 더 용감하다고 합니다. 9백만명에 가까운 신도를 자랑하면서도 교회는 세상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이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허약함에 대한 방증입니다.

 

어떤 집단이든 거기 속한 사람 중 엘리트 그룹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 좋은 사람들이 떠나고 마침내 악화만 남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려면 교회가 현재의 지배구조와 조직체계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해야하는데 이것은 기득권자인 성직자와 교회지도부가 용납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현재의 목사들은 미래의 한국교회가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교회가, 자신의 임기동안에, 당장 붕괴되지는 않으리라는 이기심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총체적인 문제를 인정하는 성직자라도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판을 짜려하지는 않습니다.

 

부정부패에 휘둘리는 교회지도자들 서양교회가 아우슈비츠에 함구함으로써 스스로 사회문제의 해결사로서의 임무를 방기했듯이 한국교회는 역대 독재정권과 광주의 5월에 침묵함으로써 사회문제를 등한시했습니다. 오히려 교회지도자들은 독재자들을 위해 기도회를 열고 그들을 축복하고 연대함으로써 교회의 소이연을 스스로 부정해버렸습니다.

 

나아가 교회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만성질환인 갈등과 분열, 부패와 비리, 대립과 소외, 위선과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비겁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단의 지도자 스스로가 부정과 부패를 저지름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조소를 받는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지성인, 양심인, 의식이 뚜렷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이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탈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일엽지추(一葉知秋)를 떠올리게 하는 현상입니다.

 

교회가 위기를 모면하고 외형적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동원하는 대표적 수법이 기복신앙과 물신주의입니다. 어느 교회를 가보아도, 혹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아도 한 가지 공통되는 현상은 목사들이 닭 모이 뿌리듯 교인들에게 복을 던져주는 광경입니다. 이런 행태는 무당 박수를 연상케 합니다. 이들이 뿌려주는 복은 예수가 가르친 여덟 가지 복과 성격이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이야기를 가르친다면 이미 기독교이기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한국교회 위기의 핵심은 교회가 예수의 사상을 따르지 않고 교인들의 생각에 맞추기를 즐겨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의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냥 호도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향기를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비록 교인이 많아도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칫 종교적 사교클럽에 흐를 위험성마저 안고 있습니다.

 

13조원의 헌금도 모자라는 한국교회

 

교회의 메시지가 약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 교회당은 화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건물도 웅장하고 강단도 호화스러워졌습니다. 성직자들의 복식도 빛나기 시작해, 수수한 양복이나 두루마기 차림 대신, 화려한 가운을 입고, 그 위에다 치렁치렁 후드를 걸치고, 목에는 십자가를 매고 금빛 찬란한 장식을 다는 목사들이 늘어났습니다. 예배 의식도 덩달아 화려해졌습니다. 교회의 외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성성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정신은 죽어 가면서 외형만 화려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세상을 리드할 수 있어야합니다. 마치 동력을 가진 기관차 한 량이 수십 량의 객차를 끌고 다니듯이,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야합니다. 동력이 끊어지면 기관차나 객차나 구분이 없어집니다. 생명력을 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끌지 못하면 오히려 세상 풍조가 교회를 유린하게 됩니다.

 

교단의 원로인 강원용 목사는 이런 한국교회의 총체적 문제를 꼬집어,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는 설교하는 만 남았고 교인들은 설교를 듣는 만 남았다고 질타합니다. 이제는 설교도 웃기고 재미있는 것이라야 인기를 모으는 시대로 접어들어 교계방송에서는 개그맨을 능가하는 강사들이 단연 인기스타입니다.

 

지난해 간행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 한 사람이 연평균 150만 원을 헌금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 전체로 보면 연간 13조원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이 많은 돈이 하나님을 위해 쓰인다고 믿는 순진무구한 교인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장려하고 많은 이벤트를 통해 헌금을 걷어 들이지만 어느 교회든 돈이 남아도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마다 만성 자금부족에 허덕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사업을 많이 벌여서가 아니라 외형적인 성장으로 인한 기초 칼로리가 지나치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갑판에서 은성한 파티를

 

사실 종교 이야기는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비판하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름날의 돼지고기와 같아서 잘 해야 본전이기 때문이지요. 욕을 먹더라도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한국교회의 내일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무너진 서양 교회와 똑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타이태닉호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겠지요. 그런데도 지금 교회는 머지않아 가라앉을 호화로운 갑판에 은성한 파티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제 글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글의 마지막 관심은 교회가 위기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에 모아집니다. 그럴 경우 교회는 필경 프로이트 이론의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심리에 대한 지식을 쌓아갈수록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비합리적인 부분이 너무도 많아 합리가 비합리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성적인 생활을 꾸려갈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환상과 미신을 좇는 생활을 추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는데도 위기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의 은총이나, 지도부의 적절한 대응 덕분이 아니라 프로이트가 지적한대로 환상과 미신을 좇는 대다수의 비이성적 신도들의 열광 덕분일 것입니다. 그때쯤 엘리트 교인들은 속속 교회를 떠나고 그 빈자리를 품격 낮은 목회자와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 차고 앉아, 철없는 교인들의 피해는 하늘에 닿을 것입니다